이사를 하고 석 달이 지났다

이사한 후로 집이 좀 더 넓어졌다. 전에 살던 세입자가 쓰던 가구를 양도받기로 하여 집에 수납공간도 늘어났다. 처음 내 방을 가져 본 게 지난 봄이었는데, 그때도 이런 저런 물건들을 늘리기 싫어서 한동안은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집에 들이지 않았었다. 큰 전신거울에 미등 하나를 켜놓은 걸 보고 친구는 절간 같다고 좋아했었다.

하지만 새로 이사한 집에는 각종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이 많이 있었는데, 청소기며 전자렌지며 세탁바구니까지 딱히 내가 뭘 더 구입할 필요도 없을 만큼 물건을 많이 남겨놓고 갔다. 이 물건들을 보면서 더 이상 물건을 살 일은 없겠구나 생각했다. 한 달동안은 영화 기생충처럼 남의 집에 사는 기분이 들어서 이상했지만 말이다.

그러는 와중에 드문드문 이전에 살던 사람들의 흔적들을 발견했다:

  • 서랍 안쪽에 붙어있는 모짜렐라 스팸 에그 스티커
  • 창문 샷시에 적혀있는 낙서
  • 벽에 뚫려있는 작은 압정 구멍들
  • 10장을 채 못 모으고 붙어있는 떢볶이집 스티커 8장
  • 세탁기가 흔들리지 않도록 잘 끼워놓은 대용량 세제통
  • 처마 위로 던져진 메모리폼 베개 그리고 남겨진 베개 ​

이런 흔적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내가 알 수 없는 과거의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. 흔적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말이다.

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지났다. 그 사이 나는 이사를 했고, 회사도 옮겼다. 할아버지는 어떤 유언도 남기지 않고 떠났지만, 나는 고모가 산 그의 셔츠를 입고 출근을 한다. 내 뒷모습에는 아버지의 체격이 있고 내 성격에는 어머니의 수줍음이 있다. 내 플레이리스트에는 삼촌 즐겨 부르던 김현식이 있다. 내가 매일 마주하는 사람들에게서도, 길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할머니에게서도 내가 알 수 없는 과거의 사람들이 살고 있겠지. 나는 어떤 흔적을 남기고 이곳을 떠나게 될까? 알 수 없는 미래의 사람이 나를 생각할까?